자유게시판&이용후기
중학교 때 나의 별명은 수학 박사였다.
친구들이 나를 수학박사로 불렀다.
난 과목중에 수학이 제일 흥미로웠다.
친구들이 어려워 하던 수학 문제를 내 책상에 가지고만 오면 난 척척 풀어 내었다.
아침이면 친구들이 수학 문제와 연습장을 가지고 차례를 기다린다.
문제를 풀어 주면 친구들은 고맙다고 연습장을 주기도 했다.
한데 문제가 풀어지는 원리 즉 공식을 정확하게 가리켜 줘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린 마음에 내보다 수학을 더 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득 하지만,
당시로서는 공부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 할 수 없었다는 것!
한데 난 선천적인 수재도 아니었고 다만 집에서 둘째 오빠에게 수학을 선행학습을 했던 탓일 것이다.
요즘의 과외와 비슷했던 선행학습을 말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 일부터 시키는 집들이 많았기에
친구들은 공부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공부에 흥미를 얻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도 적응을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는 학원도 없었고 과외는 꿈도 꾸지 못했기에
어쩜 나의 형편은 행운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러 딸을 학교에 보내니 딸 또한 수학에 두각을 내었다.
경남을 대표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며
고등학교 때는 문과에서 톱을 하기도 했다.
난 NQ 지수가 낮지만 명석했던 딸내미는 NQ가 높았다.
난 청소년기 시절 친구가 필요 없었던 기억이 나지만
딸내미는 주위에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딸이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로 심지어 학원을 끊은 아이들도 발생했다.
난 딸과 달리 나의 내면에는 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유년시절부터 의식의 궁핍함을 겪지 않았던 것이 이유이지 않았을까.
주위는 늘 부족함이 없이 풍족했으며 우월주의가 내 삶을 지배했었던 것 같다.
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신은 몇 십 년 동안 건강으로 나를 연단 했다. 아마도 정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